인생의 발견 6장 부자는 빈자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카네기는 비범한 지성, 스코틀랜드인다운 실용성, 활력, 엄청난 매력, 거래에 대한 예리한 본능 등 모든 사람을 능가하는 아주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도금시대의 거물 기업인에 관한 저서에서 찰스 R. 모리스는 이렇게 평한다. “(동시에) 카네기는 (...) 어떤 짓을 해서라도 상대를 지배하려는 성격이었다. 아주 매몰찬 사람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치 자신의 본분이 사회복지 사업이라도 되는 듯 늘 인도주의적 이상가로서 버젓이 행세했다. 세계 최고의 강철왕이 되어서도 여전히 노동자에 대한 요구 강도를 높이고, 그들의 봉급을 삭감하면서도 친(親)노동자 성명을 발표하고 측근의 아첨을 받았다.”
영향력 있는 사람도 가난한 사람들만큼 배고플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들의 간탐이나 인정이나 박수나 존경에 대한 굶주림 때문에 고통 받는다. 이런 사랑에 대한 허기는 "너 자신을 알라"는 식의 현대의 인위적인 대안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이런 인공합성물에 의존해서 자신감을 끌어올리려는 사람도 있지만 과대망상과 서글픈 자기기만을 유발하고 일종의 정신적 자위 행위가 될 뿐이다.
타인의 인정과 박수, 존경을 원하는 삶을 우리가 감히 헛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타인에게 권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그들과 나 모두를 인정하고 각자의 삶을 존중해야하는 걸까?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혼란스럽고, 내가 아직 어리석기 때문에
매번 답이 변한다.
오늘의 답은 그러한 삶이 진정한 행복은 아닐 것이라는 추측이다.
쾌락과 행복은 다른 것이고, 그것들은 쾌락이라 생각한다.
부자라면 쾌락을 더 쉽게 취할 수 있고, 끊임없이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허기지지 않는 쾌락을 통해 쉽게 행복한 기분을 가질 수 있다.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을 쾌락과 고통으로 설명한다. 행위자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제거하려는 행위는 이기적인 행위이고, 타인의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제거하려는 행위는 도덕적 가치를 갖는 행위라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여전히 매력적인 신기루로 남아 있는 이유는 돈을 많이 버는것의 쾌락과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부자의 삶을 경험하기란 어렵다.
부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그런 삶을 살아보았다는 것이다.
빈자가 부자에게 삶의 가치관이나 목표에 대해 조언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물질적인 것을 위해 살아온 삶에 대한 회고나
돈을 많이 벌며 오는 쾌락과 고통을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오직 돈을 위해 내 주변을 둘러싼다. 요즘은 내가 길을 걷기만 해도 사람들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며 “나는 그저 나 자신이고 싶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1122137375&code=970204#csidx41d259f616d1877bbb84577accbe5c0
사실 부자의 삶을 살지 못해서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떠한 뚜렷한 답을 생각해 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부자는 상대적인 정의다.
지금의 나와 통장잔고가 0일 때 나의 차이는 여유다.
살기 위한 자금이 있으므로 여유가 생겼고,
그 여유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 몰두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그 때의 나에게 여유를 가지라는 조언이 도움이 될까?
+기본소득제